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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입국의 그늘,밀수 밀화] <19> 월광카바레 밀수사건



‘지명수배됐던 밀수꾼이 카바레에서 춤을 추다가 잡혔을까, 아니면 카바레에 밀수품을 숨기다가 들켰을까?’

대체 이 밀수사건에 어떤 사연이 있기에 ‘월광카바레’란 이름이 붙었을까.

1965년 6월 6일 현충일 새벽 4시30분. 부산항 해군정보기관의 전용부두 인근(현재 중구 중앙동 수미르공원 부근) 도로에서 건장한 청년 3∼4명이 둥근 물건꾸러미를 군용 지프에 싣고 있는 것을 영도경찰서 관할 연안초소에 근무하던 김만수 순경(당시 39세)이 발견했다.

약 200m 떨어진 초소에서 볼 때 밀수품이란 것을 직감한 김 순경은 혼자 힘으로 검거하기 힘들 것 같아 인근 역전파출소로 가서 지원을 부탁했다. 다시 현장에 와서 보니 어느새 군용 트럭 한 대가 불어나 있었다. 김 순경이 꾸러미를 헤집으려는 순간 청년들이 김 순경의 얼굴을 내리치며 복부를 걷어찼다. 다행히 그 무렵 역전파출소 순경과 방범원이 도착했고 언제 나타났는지 헌병 2명까지 가세해서 진상조사를 한답시고 부산을 떨었다. 상부에 보고를 마친 김 순경은 병원에 입원하는 처지가 됐다.

다음 날 신문에는 밀수품을 적발한 도로 곁 ‘월광카바레’ 이름을 앞세워 ‘월광카바레 앞 밀수 사건’이라고 대서특필됐는데 (밀수꾼 검거가) 부산지구 제6헌병대 유모 중사 등 2명의 공적으로 둔갑돼 있었다. 또한 김 순경은 헌병들이 밀수범을 검거할 때 나타났다가 화주에게 맞았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진상을 깨달은 김 순경은 억울함을 상부에 호소했다. 군 수사요원이 관련된 사건이니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내 이 사건은 부산지검 이창우 검사 지휘 아래 수사가 이뤄졌다. 밀수품은 일본 여성용 주름치마 95장 외에 5종(당시 시가 500만원)이었는데 화주는 5·16 직후 밀수 혐의로 검거됐다가 불과 1년여 전 대사면으로 풀려난 왕년의 밀수꾼 한모씨였다. 그는 밀수깡패를 양륙책, 현역 군인을 운반책, 전·현직 경찰을 보관책으로 하고 조직 결성에 권력기관을 개입시켜 사건을 주도했다. 당일 운반책으로 나섰던 권력기관의 운전사 3명은 먼저 구속됐다.

사건이 터진 지 13일 만인 6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경찰을 폭행한 밀수범과 밀수조직을 일망타진하라는 특별지시가 떨어졌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합동수사반. 초대 반장엔 서주연 대검찰청 검사가 임명되고 군·경찰·검찰·세관 등 수사관이 참여, 전국 22개처에 지구반을 편성했다.


이로써 특공대밀수 및 기타 강력 밀수사범 단속을 위한 본격적인 ‘밀수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밀수사건으로 인해 재미를 본 것은 다름 아닌 이름을 빌려준 월광카바레였다. 유명세 때문에 카바레 문전은 뜨거워졌으나 밀수조직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사진설명=1965년 6월 열린 밀수사범 근절을 위한 합동수사반 발족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