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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득의 관문백물] (4) 묄렌도르프의 선물 ‘예수성교전서’

[이용득의 관문백물] (4) 묄렌도르프의 선물 ‘예수성교전서’
1872년 번역된 '예수셩교젼셔' 표지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는 존경스러운 기독교인 가운데는 성경밀수자도 포함된다고 한다. 두려움과 열정 속에서 비밀스럽게 목적지에 성경을 밀반입시키는 특수 사역(使役)의 공로 때문이리라.

지난 1955년 철의 장막이라 불리는 동유럽의 공산국가를 비롯해 오늘날 중동의 이슬람국가 등지에 성경을 밀반입하는 일들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개항이 되고 세관이 설치되는 등 개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는 판국에 어디 우리나라인들 복음화의 바람이 불지 않았으랴. 가뜩이나 수구세력인 전통 유교세력의 격심한 반발과 배척은 개화와 근대화의 발목을 잡기는 했지만 역사는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대로 두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관이 설치된 해는 1883년.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추천으로 고빙되어온 묄렌도르프는 고종의 지시에 따라 오늘날의 관세청장 위치에서 개항장인 부산.인천.원산에 3개의 세관(당시는 해관)을 설치하게 된다.

그 이듬해 한국 개신교선교사에 기억될 만한 일들이 이러한 관문에서 벌어지게 된다. 인천항에 최초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화물로 반입되다 금서로 유치돼 인천해관보세창고에서 엄중히 관리됐다. 선교사 알렌은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목적지인 인천을 가기 위해 같은해 9월 17일에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으로 오가는 화물선은 영국계 이화양행 소속의 660t급 남승호(南陞號)로 이 기선의 항로는 상하이에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과 인천을 오가는 정기화물선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들이 개항 직후가 아니라 세관 개청 직후라는 데 흥미를 끈다. 더욱이 번역된 성경과 선교사가 같은 해에 들어왔다는 것만 봐도 관심을 끌게 된다. 특히 성경은 만주 우장(牛莊)에서 1872년 로스 목사의 지도하에 세례를 받은 한국인 이성하 등이 우리말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로서 육로를 통한 반입이 불가능하자 해로를 통해 들여온 것이었다. 자그마치 반입된 성경이 6000권이나 되다 보니 육로를 이용하기엔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규모 또한 커서 소문이 안 날 리 없었다.

갑신정변 중에 심한 부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현대의술로 구한 사람이 알렌이다. 그는 묄렌도르프의 소개로 조선에 온 최초의 장기체류 평신도 선교사이자 의사였다. 그리고 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 신분으로 일을 하면서 외국 공관의 공의는 물론 한때 인천해관의 검역관으로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현대의술을 겸비한 공의는 주재국 외교가에서뿐 아니라 개항장인 관문의 검역을 위해 필요한 구성요원이었다. 이처럼 초창기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보다는 의사라는 신분이 더 민중에게 신임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묄렌도르프의 지원 속에 이루어진 밀수품 한글성경은 이들 선교사의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