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만에 첫 분기 역성장
갈림길 한국 경제 축소판
새 정부 소비부터 살려야
최진숙 논설위원
작가 김호연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2021년)'의 내용은 제목에 붙은 '불편'하고는 사실 별 관련이 없다.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고 믿는 배우 출신 작가 인경이 청파동 골목길에 등장한다. 바퀴가 시원찮은 트렁크를 질질 끌고 낡은 보도를 끝도 없이 헤매다 마침내 찾은 새 작업실은 삼거리 편의점의 건너편 빌라 3층에 있다.
자정이 너머 깨어난 인경이 이 편의점을 들렀을 때 취향에 맞는 김밥과 샌드위치는 동이 나고 없다. 불편한 편의점이 돼 죄송하다고 더듬더듬 말하는 이가 노숙자 출신의 심야 알바생 중년 사내 독고다. 불편은 이 파트에서만 나온다. 미스터리한 인물 독고가 편의점의 주변 인물들과 함께 치유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무릎을 친다. "스스로를 도우라, 말을 들어주라, 행복은 길 위에 있지 않고 길 자체다."
한국인의 애환을 풀어낸 장소가 편의점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국내 전역에 깔린 편의점 숫자가 5만7000여개(2024년 기준)이고, 관련 종사자는 30만명이 넘는다. 인구당 점포 수는 편의점 왕국 일본을 능가한다. 한국 유통시장의 모세혈관이자 소매업의 대명사 자리를 편의점이 이미 꿰찼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 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작가 김애란의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 첫줄에 나오는 내용이다.
작품 속 주인공의 집 앞에는 세개의 편의점이 있다. 서로 30m도 안 되는 거리다. 엘지25는 주택단지 근처에, 바로 맞은편에 패밀리마트가, 거기서 몇발 안 가 세븐일레븐이 있다. 주택단지로부터 엘지25는 일직선이고 패밀리마트는 니은자 모양, 세븐일레븐은 디귿자다. 소설이 출간된 2005년은 편의점이 본격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하루에도 몇번을 오가지만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비정한 도시인과 편의점은 닮은 구석도 많다.
편의점이 한국에 뿌리를 내린 지 올해로 37년이 됐다. 88올림픽을 치른 이듬해 미국계 세븐일레븐이 서울 송파구에 문을 연 올림픽점이 신호탄이었다. 출점 후 4년도 안 돼 전국 1000여곳이 오픈했고 확장세는 갈수록 불붙었다. 점주들의 회고에 따르면 최고 호황기는 2002년 월드컵 전후다. 당시 하루에만 수백만원 매출을 올리는 점포가 수두룩했다.
별난 이름의 점포도 전국에 쏟아졌다. 거제아주잘생긴점, 역삼황제펭귄점, 대전금나와라뚝딱점, 포천인생역전점 등 수도 없다. 산간벽촌의 편의점에도 매주 50~60개, 연평균 3000여개 신상품이 깔렸다. 1년 이상 팔리는 제품은 3%도 안 된다. 트렌드를 좇아 굴러온 신상품이 박힌 신상품을 여지없이 밀어냈다. 신문물의 향유지 역할도 한 것이다.('어쩌다 편의점', 유철현)
불패를 모르던 편의점이 올해 사상 첫 분기 역성장을 기록했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코로나19 등 대격변기에도 멈추지 않았던 성장세가 올 들어 확연히 꺾였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올해 통틀어 사상 첫 마이너스 성장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조짐과 경고는 진작에 있었다. 단기간 과속 페달을 밟은 최저임금 폐해는 업계에 치명적이었다. 주휴수당과 보험료 부담에 알바생 시간 쪼개기가 횡행했다. 점주들은 투잡을 뛰거나 종업원 없는 업자로 거듭났다. 그러고도 수익을 못 맞춰 영업을 중단한 점포가 줄을 잇는다. 점포 수는 2023년 정점을 찍고 지난해 감소로 돌아섰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을 장착한 국내외 유통거물의 공습은 또 다른 과제다.
성장이 멈춘 편의점은 지금 한국 경제의 축소판이다.
지지부진한 구조개혁, 침체 늪에 빠진 내수의 최전선에 편의점이 있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소비를 살리고 뒤떨어진 제도의 틀을 새로 짜는 일이 새 정부 1호 임무여야 한다. 동네 문 닫은 편의점 앞에서 여러 생각을 해본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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